우리나라역사13] 일제강점기 PART1(한일병합)

저번 포스팅에서는 갑오개혁이 일어나고 난 뒤 고종의 광무개혁까지 살펴봤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일본이 여러번의 단계를 거쳐 조선을 식민지배 하려는 과정을 살펴보겠다.

 

 

 

1. 러일전쟁발발(한일의정서, 1904년 2월)= "청나라와 전쟁하게 길 좀 비켜주십시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은 그간 두터운 사이를 보였던 러시아 편도, 일본 편도 들지 않겠다는 중립선언을 한다. 중립선언에 대해 일본측은 상당히 불쾌감을 느끼고 한일의정서를 맺게 되는데 한일의정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 황실의 안녕을 보증하고 조선은 시정 개선에 대한 충고를 받아들일 것."- 한일의정서

 

 

2. 1차 한일협약(1904년 8월)=고문정치

 

한일의정서를 맺고나서 6개월이 지나 일본은 의정서가 아닌 협약을 조선과 맺게 한다. 1차 한일협약의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다.

 

"외교고문 스티븐스(친일파 일본인)을 들이고, 재정고문 메가타(화폐정리사업 실시)를 들여라"

 

즉, 제1차 한일협약은 고문정치를 하라는 것이고, 본격적인 조선에 대한 식민야욕이 보여지는 협약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한일협약, 즉 고문정치가 들어섬에 따라 화폐정리사업도 실시되어 조선의 경제를 지배하려는 의지도 확인할 수 있다.

 

 

3. 2차 한일협약(1905년 11월)=통감정치, 외교권박탈

 

을사늑약이라고도 불리운다. 앞선 고문정치(1차 한일협약)이후 청일전쟁에서 우위를 독점하게 되면서 일본의 식민지배 야욕은 노골적으로 들어나 보호정치를 해준다는 아래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다.

이에 반대하는 을사의병이 일어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는 전라도 태안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대마도에서 순절한 최익현과 자결로써 반대운동을한 민영환을 예로 들 수 있겠다.

 

 

4. 한일 신협약(1906년 7월)=차관정치

 

을사늑약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을 장악하려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조선의 군대를 해산하는 등 하나하나씩 조선을 점령해 나갔다. 이후 1906년 7월에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이라는 명분하에 일본인 차관을 도입하는 차관정치를 도입하게 되는데, 이때 신문지법, 보안법 등이 등장하여 언론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정미7조약에 반대하여 일어난 의병이 정미의병인데, 정미의병의 대표적인 활약으로써는 일본으로부터 강제 해산된 군대의각도의 군사를 통일시켜 '13도 창의군'을 창설하고 서울 진공작전을 펼친것이다. 13도 창의군의 대표인물으로는 이인영, 허위, 홍범도가 있다. 결과적으로는 서울 진공 작전은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며 조선의 의지를 보여줬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5. 기유각서(1909년 7월)=사법권 박탈

 

2차 한일협약에서 외교권을 박탈했다면, 4년뒤 기유각서에서는 사법권을 박탈당했다. 국외, 국내 모두 힘을 잃은 조선으로써 이제 일본의 손아귀에 놓아졌다는 것이 사실이 되었다.

 

 

6. 한일 병합 조약(1910년 8월)=총독정치

 

통치권마저 빼앗긴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날로 불리워진다.(경술국치) 이에 이범진(주러외교관), 황현 등이 자결을 하게되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과정별로 정리해보았다.

이당시 세계 정세는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배 하는 등의 다양한 일들이 벌어졌고, 미국과 일본이 밀약(가쓰라 테르트 밀약)을 맺기도 하고 영국과 일본이 동맹을 맺기도하고, 러시아마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를 인정하는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이루는 등 전 세계에서 일본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를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조선은 그저 일본에게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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