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포스팅에서는 고종이 집권하면서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문호를 개방하며, 서구 열강세력과의 문호개방과 동시에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시기까지 살펴봤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제2차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는 시점인 갑오개혁부터 대한제국의 수립 이후 시기까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관련(참고) 포스팅
1) 갑오개혁
① 제1차 갑오개혁(1894) : 1차 김홍집내각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면서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에게만 군대 요청을 했는데, 갑신정변이후 텐진조약(청,일 군대 파병시 같이 파병한다)을 구실로 삼아 일본군대가 강제로 경복궁에 점령하고 갑오개혁을 실시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당시 일본은 청나라와 전쟁을 치러야 했으므로 군국기무처를 설치, 김홍집을 중심으로한 조선관료 20여명이 주도하여 이루어진다.
1차 갑오개혁 내용으로는 대표적으로 개국기년 독자적연호 사용(기존 청나라 연호 사용폐지),경무청(근대경찰)설치, 조세 완전 금납화, 과거제폐지, 과부의 재가허용, 신분제 폐지(공, 사노비 폐지)등이 있다.
② 제2차 갑오개혁(1895) : 2차 김홍집내각
청일전쟁이 어느정도 끝나갈 무렵, 전쟁의 승리는 일본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일본은 1차 갑오개혁떄 설치한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겉으로는 김홍집을 내세워 친일파 세력인 박영효를 중심으로 홍범14조를 발표하여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2차 갑오개혁의 내용으로는 의정부를 없애고 내각제를 설치, 전국 8도를 23부로, 근대적 재판소 설치, 교육입국 조서를 발표하고 한성사범학교를 설립하는 내용이 있었다.
2) 을미개혁(1895) : 4차 김홍집내각
을미개혁을 살펴보기에 앞서, 2차 갑오개혁이 이루어진 뒤 삼국간섭(러시아를 중심)이 발생하게 되면서, 3차 김홍집내각(친러)이 들어서게 되면서 이에 불만을 품은 일본은 자객을 보내어 고종의 황후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되고 이로인해 4차 김홍집 내각이 설립하게 된다.
을미개혁의 내용으로는 기존 태양력을 금지시키고 '건양' 연호를 사용하게 했다. 또한 소학교를 건립, 단발령, 우체사 등을 설치하였다.
자기의 황후가 시해당한 것을 두려워한 고종은 러시아로 도망가게 된다.(아관파천)
3) 독립신문, 독립협회
고종이 러시아로 1년간 도망간 시점에서 서재필을 중심으로 한 신흥 사회세력이 독립협회를 설립했다. 독립협회는 국민 참정운동 즉 "의회를 설립하고 각 지방관은 지방에서 알아서 뽑게 하자" 라는 구호를 외치며 활동하였다. 독립협회의 활동으로는 기존 영은문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건립, 모화관을 개조하여 독립관을 건립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4) 대한제국선포(1897, 전제 군주제)
1년간 러시아로 도망쳤던 고종은 조선으로 돌아오자마자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나라이름을 그간 조선에서 대학제국으로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주장했다.
하지만 전제 군주제를 외치는 고종과 다르게 독립협회는 입헌 군주제를 주장하며 충돌이 일어났다. 관민공동회(1898)에서 결국 황국협회(보부상)를 통한 무력충돌을 일으키게 하며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의 입헌 군주제의 꿈은 무산이 되고 말았다.
5) 광무개혁
독립협회를 저지한 고종은 전제 군주제를 선포하며 광무개혁을 내세웠다. 광무개혁의 내용으로는 원수부(군사)를 설치하고, 의정부를 부활하며, 양전사업으로 지계를 발급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를 확립하고자 했으며, 무관학교 및 실업학교를 설립하고 은행(한성, 한일, 대한천일)을 설립하였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갑오개혁으로부터 갑오개혁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갈뻔 했지만, 러시아를 주축으로한 삼국의 간섭으로 잠시 벗어났지만 을미사변으로 인해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로 1년간 도망치고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광무개혁을 주장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한 내용까지 살펴봤었고 다음 포스팅에서는 러일전쟁이 발발하며 점차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는 안타까운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