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세도정치와 이로 인하여 문란해진 기강을 바로 잡기위한 흥선대원군(이하응)의 민생안정정책과 세계 열강에 문호개방에 반대하여 나타난 쇄국정책을 살펴보았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민씨가 정권을 잡게되면서 고종집권기(강화도조약~동학농민운동)의 사건들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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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9] 조선 왕업적 PART3(붕당정치, 탕평책)
우리나라의역사10] 조선 왕업적 PART4 (세도정치, 쇄국정치)
1. 수호조약
1) 일본
그간 프랑스 등 세계 열강의 문호개방의 요청에도 쇄국정책을 강조하면서 반대하던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그의 아들인 고종이 왕위를 잡게되면서 문호개방이 시작된 첫번째 국가가 일본이다.
*큰흐름 : 윤요호사건-강화도조약-통리기무아문설치
① 윤요호 사건(1875)
일본이 군함을 끌고들어와 강화도와 영종도를 포격하여 강제로 외교를 시도했던 사건이다.
② 강화도 조약(1876)
1년전 윤요호 사건의 계기와, 조선 내 통상 개화파(박규수)의 개항 주장으로 시작된 최초 수호 조약이다. 이 조약의 내용으로는 청나라의 종주권을 반대하고, 부산+원산+인천을 개항했으며 치외법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③ 김홍집의 「조선책략」(1880)
청나라로 조선의 수신사의 자격으로 파견된 김홍집은 조선책략을 들여와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여 조선의 책략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의 내용으로는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이다. 이에 고종은 좋은 책략이라 생각하여 전국 유생에게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④ 통리기무아문 설치
강화도 조약이 이루어지고 난 뒤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명목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12사를 두어 의정부와 별개의 정치조직으로 활용했으며, 통리기무아문의 영향으로 구식군대 중 5군영을 2군영으로 축소하고, 신식군대로써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2) 미국(1882)
최초로 맺은 수호조약이 강화도 조약이라면, 서양과 맺은 최초의 수호조약은 미국이다. 이는 청나라의 사신으로 파견간 영선사 김윤식과 이홍장 등이 매게자 역할을 하여 청나라의 알선으로 하게되었다.
내용으로써는 최혜국 대우를 약속하고, 치외법권을 인정하며, 공사를 파견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3) 영국(1885)
러시아가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의지를 제재하기 위하여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한 사건이다. 영국은 조선 중립화론을 주장하며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방어하자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2. 각종 난
1) 임오군란(1882)
구식군대(2군영: 무위영, 장어영)와 신식군대(별기군)의 차별대우에 구식군대가 들고 일어난 사건이 임오군란이다. 이당시 조정은 막을 힘이 없어 당시 청나라에게 부탁하여 막아냈는데, 이로 인해 청나라의 간섭이 시작되는 계기를 가져왔다. 또한 임오군란당시 일본공사관의 피해를 보상하라는 제물포 조약도 이루어지면서 일본의 간섭 또한 심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2) 갑신정변(1884)
미국에 의하여 민주화가 되고 있던 일본(차관정치)을 본받고, 청의 내정간섭에 대해 거부하며 급진개화파(김옥균, 홍영식, 서재필)의 주도로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급습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일본과 청나라 모두 피해를 입게되었는데, 먼저 일본에 대한 보상(일본 공사관 신축비용+배상금)에 대한 조약이 한성조약이다.
또한 청, 일 군대를 모두 철수하면서 텐진조약을 맺어 조선에 군사파병시 동시에 파병하자는 사항을 담은 내용이다.
3) 동학농민운동(1894)
① 발발원인
이당시 청과 일본의 개입 및 서구 열강과의 문화교류등으로 사회가 혼란할 때 지방의 관리들은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려 농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 중 고부의 군수 조병갑의 탐욕으로 인하여 농민 전봉준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② 1차 동학농민운동(반봉건)
고부 군수 조병갑이 농민들의 봉기로 인해 도망치고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며 안핵사 이용태를 보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오히려 농민들에게 책임을 물어 화가난 농민들이 백산에서 봉기를 일으킨 사건을 말한다. 이후 황토현전투, 황룡촌전투에서 승리하며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조정은 청나라에게 농민의 봉기를 제재하겠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요청했고 전주화약(화해약속)을 맺고 집강소(농민개혁기구)와 교정청→국군기무처(정부개혁기구)를 설치하여 마무리 되었다.
③ 2차 동학농민운동(반외세)
1차 동학농민운동이 마무리가 될 때쯤 조선조정에서 요청한 청나라 군대만 온 것이 아니라 일본의 군대도 같이 들어왔다. 하지만 일본의 군대는 전주로 향했던 것이 아니라 인천으로 들어와 경복궁을 장악하고 청나라와 전쟁을 선포했다.(제 1차 갑오개혁 동시 진행)
그리하여 일본군에 저항하기 위해 2차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였는데, 우금치전투에서 전봉준이 체포되고, 대부분의 농민들이 목숨을 잃으며 동학농민운동은 끝이 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미국와 수호조약을 맺고 이후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까지 살펴보았다. 이후 포스팅에서는 2차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됨과 동시에 일본의 영향으로 시작된 갑오개혁 및 대한제국의 수립까지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