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역사10] 조선 왕업적 PART4 (세도정치, 쇄국정치)

 

 

앞에서 붕당정치와 탕평책을 살펴봤었다면 이번시간에는 영조, 정조의 탕평책이 끝난 이후 특정 한 가문이 허수아비와 같은 왕을 세워놓고 독점하는 세도정치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후 조선후기의 실학 및 기타 조선의 문화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1. 세도정치

 

*왕흐름 : 순-헌-철

 

23대왕) 순조

 

정순왕후의 덕으로 왕위에 오른 순조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순조집권시기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신유박해와 홍경래의 난 등이 있다. 먼저 신유박해는 천주교의 확산으로 인하여 정순대비가 사교금압령으로 선교활동을 못하게 막았고, 다수의 남인들이 적발되어 유배행에 오르게 된다. 대표적으로는 정약용과 이승훈 등이 있다.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서 현존하는 저서 중 대부분을 강진에서 썼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승훈은 최초의 한국이 영세자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왕권은 추락하고 하나의 특정가문(안동김씨)집안이 독점하고 있을 시기에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발발한다. 홍경래는 몰락한 양반으로써 조선 후기 신분제가 무의미해질 시점에 발발한 사건이다.세도 정치의 폐단과 평안도 지역의 무시 등으로 일어났는데, 가산에서 시작하여 청천강 이북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여 전개되었지만, 5개월만에 집압되었다.

 

24대왕) 헌종

 

헌종 집권당시 세도가문은 노론에서 분열되었던 벽파였다. 벽파가 집권하기에 시파를 제제하기 위해 '기해박해'를 일으켰고, 기해박해의 연장선으로 '병오박해'가 발발하였다.

먼저 기해박해부터 살펴보면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벽파인 '풍양조씨' 가문이 시파인 '안동김씨' 가문을 끌어내리기 위해 전개된 사건을 말하는데, 척사윤음을 발표하고 정하상을 올려 천주교를 변호했다는 것으로 시파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사 3명을 포함하여 100여명이 처형당하고 주권은 안동김씨에서 풍양조씨로 이전되었다.

기해박해의 연장선으로 병오박해가 1846년 일어났는데, 프랑스 함대 무력시위로 인해 김대전 신부 및 천주교를 믿고 있던 신도 8명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25대왕) 철종

 

헌종시기에 탄압되었던 안동김씨가 다시 집권을 하게되는 시기가 철종시기이다. 황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하나의 가문이 조선 전체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시기였기에,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지 못하였고 이는 농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쳐 결국 1862년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경상도 우병사인 '백낙신'의 탐욕으로 인한 무분별한 수탈로 인해 삼정의 문란(전정, 군정, 환곡)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당시 몰락양반 유계춘을 중심으로 하여 진주 백성 수만명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다. 이후 조정에서는 농민봉기를 제제하기 위해 안핵사(박규수)를 파견하여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회유했으나 삼정이청정은 결국 실현되지는 못했다.

 

 

23대 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인동김씨→풍양조씨→안동김씨의 순으로 하나의 가문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독점하고 삼정의 문란이 일어나 이에 따라 백성의 삶은 피폐해져만 갔던 시기를 살펴보았다.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근대사가 시작되는 고종(흥선대원군)의 왕업적을 살펴보겠다.

 

 

2. 쇄국정치

 

고종이 어린나이에 즉위하여 그의 아비인 이하응(흥선대원군)이 1863년부터 1873년까지 10여년 동안 통치를 한다. 앞서 살펴본 세도정치 시기에도 프랑스 등 여러나라에서 교역 및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조정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는데, 흥선대원군은 더욱더 강건하게 서양 및 타국과의 교류를 철저히 막았다.

흥선대원군의 업적은 쇄국정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기존 세도가문을 축출하고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되었던 경복궁을 재건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당백전, 원납전 등을 발행하여 공사비를 충당하게 된다. 또한 민생안정을 위하여 과거 삼정의 문란(전정, 군정, 환곡)등에 대하여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세도가문의 토지를 빼앗아 국가의 소유로 만들고 기존에 군정을 납부하지 않았던 양반들에게도 징수를 하는 호포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환국의 대비책으로는 사창제를 실시하여 마을 단위 자치적 창고를 만들도록 했다.

이러한 시기에 러시아→프랑스신부처형(병인박해)→미국(제네럴셔먼호)→프랑스(병인양요)→독일(오페르트도굴시도)→미국(신미양요) 순으로 조선과의 마찰이 있었고 끝내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건립하고 민씨정권에 의하여 왕권을 고종에게 넘겨주고 쇄국정치는 끝이 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탕평책 후 한 가문의 권력 독점인 쇄도정치와 쇄도정치의 폐단으로 발생한 삼정의 문란 등을 수습하기 위해 외부 나라와의 교섭은 일체 거부하여 쇄국정치를 펼쳐 나가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까지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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