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역사9] 조선 왕업적 PART3(붕당정치, 탕평책)

 

 

 

앞선 포스팅에서 훈구와 사림의 대립 사화 및 선조집권 이후 사림내부의 분열과정에 대하여 살펴봤었고, 이번 포스팅에서는 본격적인 사림 내부 쟁탈전 즉 붕당정치의 전개 및 붕당정치 이후 혼란한 국정을 바로 세우려는 영조, 정도의 탕평책에 관하여 살펴보겠다.

 

 

1. 붕당정치

 

*왕흐름 : 광-인-효-현-숙

 

15대왕) 광해군(대북)

 

북인 중 대북세력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광해군은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한다. 이에 친명배금을 주장하던 서인의 반발로 강제퇴위(인조반정)되며 광해군은 왕위에서 내려오게 된다.

 

16대왕) 인조(서인,북인OUT)

 

철자한 서인의 친명배금의 정책으로 화가난 금나라가 2번 쳐들어오게 되는데, 1차 침입이 정묘호란(광해군을 위한 보복), 2차 침입이 병자호란(후금이 청나라를 건국함에 있어 군신관계 요구)이다. 서인의 집권으로 북인은 사라지게 된다.

또한 인조시기에 '이팔의 난'이 발생하여 인조반정의 부당함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17대왕) 현종(예송논쟁: 서인VS남인)

 

효종의 죽음과 동시에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 복상기간 문제로 예송문제가 시작되었다. 1차 예송은 기해예송으로 서인(송시열)이 승리하고,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은 남인(윤선도,허적)이 승리하여 남인이 집권하였다.

 

19대왕) 숙종(4번의 환국)

 

갑인예송으로 남인이 집권을 할 때 숙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경신환국(남인이 왕의 유악을 함부로 사용한 사건)이 발발한다. 이에 남인처벌을 두고 서인은 노론(강경보수, 송시열)과 소론(온건진보, 윤증)으로 분열되며, 남인은 사라지게 된다. 기사환국(장희빈 아들 책봉)이 터짐에 따라 다시 남인이 집권하고, 갑술환국(인현황후 중전 복위)으로 노론, 소론이 다시 집권하게 된다. 이후 무고의 옥(장희빈이 무당을 불러 인현황후를 저주한 사건)르로 노론이 집권하게 되며 노론이 최종집권 세력으로 끝이 난다.

 

 

2. 탕평책

 

1) 영조(완론탕평)

 

사림 내 권력 쟁탈전으로 국가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낭인의 아들인 영잉군(영조)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영조는 붕당정치로 혼란해진 국정을 정상화하기 위해서 탕평책을 추진하게 된다. 영조의 탕평책은 완론탕평으로써 온건한 인물 중심으로 등용을 하고, 타협을 통한 국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에 탕평비 건립, 탕평채, 서원정리, 이조전랑의 권한 축소 등을 주장하며 시정하려 했지만, 이는 붕당정치 폐단의 근본 해결이 아니고, 단지 강력한 왕권으로 일시적인 효과밖에 거두지 못했다.

직접적으로 실시한 정책을 살펴보면, 노비 모종법(어머니의 신분을 따름), 가옥한 형벌금지, 균역법(군포2→1필), 속대전(경국대전보완 법전), 동국문헌비교(백과사전)등을 편찬하였다.

또한 임오화변(소론의 역모사건으로 소론의 죽음)으로 노론은 시파와 벽파로 나뉘게 된다. 시파는 소론을 동정하고, 벽파는 죽음에 동의하는 부류였다.

 

2) 정조(준론탕평)

 

앞선 영조 시기 온건한 인물만을 등용하여 완론탕평을 펼쳤다면, 영조의 아들 정조는 당파의 시비를 정확하게 가린 정극탕평을 추진했는데, 시파(소론의 죽음을 동정)를 중심으로 소론과 남인을 동등하게 등용하였지만 개개인의 힘에 의해 운영되던 큰 굴레는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이 한계로써 지적되는 점이다.

정조의 정책으로는 규장각(왕의 도서관)설립, 초계문신제(젊은 문신 재교육, 친위세력육성), 장용영 육성(국왕호의부대), 신해통공(금난전권X), 수원화성 건설 등이 있고 편찬 사업으로써는 대전통편(법전 정비), 동문휘고(외교문서 정리), 무예도보통지(병법서)등이 있다.

 

 

 

이와 같이 사림 내부의 쟁탈전인 붕당정치 이후 문란해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영조, 정조의 탕평책을 살펴보았고, 다음 포스팅에서는 하나의 가문이 왕권을 독점하는 세도정치의 폐단과 조선의 여러가지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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