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유교건축(궁궐,객사)


 

저번시간에 이어 이번 포스팅에서는 조선시대의 유교건축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의 유교건축을 대표하는 3가지로 종묘, 사직, 문묘를 살펴보았고 이와 더불어서 궁궐과 객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궁궐

1) 경복궁

고려시대의 불교가 흥행했다면, 조선시대에는 국교가 유교라고 해도 무색할 만큼 유교가 깊숙히 뿌리내렸습니다. 이에 따라서 궁궐의 배치나 궁궐의 이름도 유교적 개념을 따라갔는데,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인 경복궁은 완벽한 유교적 교리가 적용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복궁은 도성 북쪽의 백악 아래, 도성의 서북쪽에 위치했는데, 향은 남향을 했습니다. 앞선 포스팅에 조선의 도성인 한양은 중국의 예제를 바탕으로 하여 조선에 맞는 풍수리지를 접목시킨 배치라고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전조후침의 구성으로 이루어집니다. 앞에 정전을 두고 뒤에 침전을 두는 방식으로써 경복궁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조때 경복궁이 1차적으로 중건되고, 세종조에 이르러 전반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대표적인 예로써는 교태전을 건립하여 신하와의 교류를 꾀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조참의식이나 상참의식에 대한것과 오례에 대한 강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조후침에서 경복궁의 침전에 해당하는 강녕전은 건물 중앙에 3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대칭으로 방을 두는 평면구조인데, 평면구조만 놓고 본다면 서원의 명륜당과 비슷한 평면입니다. 강녕전은 중앙에 단층의 월대를 조성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침전의 월대는 중앙부에 위치하기 보다는 자연지세에 맞추어 조성하는 경향인데, 경복궁의 유교적 관념으로 정확히 중앙부인 대청에 단층월대를 배치한 특징이 보입니다.

 

2) 창덕궁

창덕궁은 태종 이방원이 내관 출신의 무관 박자청을 공사 총감독관으로 두어 이궁으로 조성한 궁이면서,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과 이타 다른 궁들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새롭게 다시 건립한 궁이 창덕궁입니다. 양란이후 경복궁은 흥선대원군집권 시기까지 거의 폐허로 존치되었는데,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의견때문으로 해석됩니다. 그리하여 창덕궁은 양란전에는 이궁으로 사용되지만 양란이후에는 정궁으로 오랜기간동안 사용된 궁입니다.

창덕궁은 도성의 북쪽 응봉을 주산으로 삼음과 동시에 종묘의 뒤편의 같은 맥을 이어내려가면서 위치했습니다. 이는 자연지세를 적절히 활욯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연지세에 순응했기에 창덕궁의 진입방식은 경복궁처럼 직선 진입이 아닌, 서남측에서 동북측으로 계단형으로 꺾이며 진입하는 형태가 나탔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궁궐 진입방식을 데칼코마니 뜬것 처럼 180도 돌려놓은 형태라고 할 수 있겠고 이는 고려시대의 궁배치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객사

 

객사는 지방의 마을마다 하나씩 설치되었던 건물로써, 하나의 마을에서 가장 위계가 높고 격식을 갖춰 건립된 건물입니다. 주로 객사는 중앙에 정청이 있고, 좌우에 익사를 두어 평면이 구성되는데, 입면형식으로 보았을 때 중앙의 정청은 맞배지붕으로 가장 높고, 좌우 익사는 팔작지붕으로 한단계 낮은 지붕을 형성 하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청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에게 하례를 올리는 장소입니다.

익사는 일반적으로 온돌 구조로써 사람이 숙식 할 수 있는 지금의 호텔과 같은 공간을 말하는데, 좌익사보다 동익사가 위계가 높아 사신이 동시에 와도 위계가 높은 사신이 동익사에 머물며, 동익사 주변에는 연못을 마련하거나 빼어난 경치와 맞물려 조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객사가 건립되는 근처에는 대게 화려한 단청을 한 누각이 세워지기 마련인데, 지형여건이나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객사와 가까운 높은 계곡이나 강가에 누각을 세워 휴식의 공간을 마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각의 대표적인 예로써는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성천 동명관이 있습니다. 제시한 누각들의 특징은 큰 강 주변에 조영되었다는 특징또한 기억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여기까지 조선 유교사상을 반영한 건물인 궁궐과 객사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궁궐은 도성에서 가장 중요하고 장대하며 왕과 신하가 머무는 공간이며, 객사는 지방에서도 왕을 섬기며 중요한 사신을 대접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되는 건물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중앙집권화와 유교사상을 잘 보여주는 두개의 건물에 대하여 반드시 숙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사료되며 이상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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