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수도 한양과 지방도시(조선초기건축)

이번시간부터 조선시대의 건축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말기 혼란한 상황속에서 신진사대부가 주축이되어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건국했습니다. 나라의 명칭이 바뀌고 종교도 불교에서 유교로 바뀐만큼 건축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그 변화에 대한 건축의 특징과 건축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조선의 수도 한양

 

1392년 신흥 무인세력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정도전의 힘으로 조선이 건국되었습니다. 이당시 중국은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바뀔 시기였는데, 새로운 시기인만큼 외부세력에 대한 견제로 철저한 쇄국정책을 양나라가 모두 펼쳤습니다. 조선초기의 사대부(집권층)들은 기존 고려의 국교라고 할 수 있었던 불교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가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유교사상이 기본으로 되면서 이들의 입지는 더욱더 견고히 다져졌습니다.

조선건국 당시 수도로써 가장 근접했던 지역은 공주(계룡산자락)였습니다. 하지만 풍수지리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려의 옛 위성도시인 남경지역 지금의 서울로 한양의 도읍지를 정했습니다. 이는 풍수지리사상에 유교적 사상을 반영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는데 풍수지리적 관점에서는 물자의 소통의 측면에서 물길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북측에 주산(백악산) 남측에 목멱산(남산)이 있고, 좌청룡(낙산) 우백호(인왕산)이 있어 풍수지리적 조건에 부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풍수지리사상을 이긴 유교의 개념으로는 궁궐의 향을 결정하는 문제였는데, 동향을 해야한다는 풍수지리의 승려 무학과 남향을 해야한다는 유학자인 정도전의 다툼 끝에 결국 유학자인 정도전의 주장을 받아드린것이었습니다.

결국 조선의 수도 한양은 풍수지리를 고려하면서 그 틀안에서 성리학적 개념을 적용시킨 하나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4대문 중 남대문에 속하는 숭례문은 정남향이 아닌 치우친 곳에 세워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도성의 남대문인 숭례문보다 동대문이 주로 활성화 되었는데, 이는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이 동대문과 연결되어 있고, 도성안에서의 상업활동의 중심지가 동서대로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기에 조선의 수도 한양은 풍수지리를 기본으로하여 지형적 특성을 바탕으로 깔고, 그 위에 예제(성리학)를 억지로 끼워맞추려듯 적용하려 했던 흔적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2. 지방도시의 정비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계획하고 다듬어 나감과 동시에 지방의 건축도 정비를 시작했습니다. 한양이 철저히 예제에 입각해서 건물의 배치나 통치시설을 건립했다면 지방에서도 마찬가지로 단묘와 객사를 설치했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직단은 서측에 성황단은 남측에 여단은 서측이나 북측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습니다. 이는 지방에서도 똑같이 왕이 다스린다는 중앙집권체계의 한 면모라고도 볼 수 있으며 이때문에 각 지방의 고유한 특성은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초례하기도 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