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전 조선건축(지방 사림건축)


 

이번시간에는 조선초기를 지나 중기로 향하기 직전인 조선초중기 시기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전기와 후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14세기 조선을 건국하고 왕권을 바로잡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 결과 15세기 말부터 16세기 말 즉,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는 왕권이 안정됨에 따라 민생도 안정적이었습니다. 오늘은 이시기에 조선건축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가사규제를 어긴 왕족 및 사대부

왕권이 안정되면서 민생도 안정됨에 따라 민간상인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민간상인은 공무역과 다른 차원으로써 경제적 상승기를 보여주는 예로도 보여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개는 일부 소수 민간상인층에만 적용되는 것도 보여집니다.

경제적 호황기 속에서 우선적으로 왕족 및 왕친척들의 주택에서 기존의 가사제한을 하나둘씩 어기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왕족 뿐만이 아니라, 사대부들에게 까지 번져 너"도나도 하니 나도 어겨도 되겠지" 라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번지기 시작합니다.

16세기 초 이미 조선의 전반적인 사회는 사치풍조에 물들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 당시부터 왕족뿐만 아닌 사대부, 고위 관료계층까지 가사규제를 어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치풍조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완전히 무너졌으며, 이후 병자호란까지 터지며 설상가상으로 상황이 안좋게 되어짐에 따라 단위부재의 최소한의 가공만하며 소박한 건축으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2. 지방사림의 화려한 건축

농촌지역의 일부 세력은 농사기술의 혁신적인 방법으로 경제력을 향상시켜 스스로 지방 한 마을의 지배층으로 대두되는 일이 발생하곤 했습니다. 미개간지를 개간하기도하고, 수리사업 자체가 통하지 않은 당시에는 강을 기준으로 상류지역에 지주층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의 예로써는 경북 안동이 대표적이며 호남지역과 충청지역도 하나둘씩 농사기술을 바탕으로 자본을 형성하여 지배층으로 자리를 꾀차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마을에는 공통적으로 몇가지 특징이 보이는데 그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마을 배면에는 마을을 감싸는 언덕이나 조그만 산이 있습니다.

2) 마을 정면에는 주산개념의 바라볼 산이 있습니다.

3) 마을과 연접한 맑은 물이 흘러야 합니다.(강이나 개천)

4) 마을은 큰길에서 직접 바라볼 수 없는 지역이며, 돌아들어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5) 마을과 연접한 곳에 비옥한 땅(농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경상북도의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은 위와같은 공통된 지리적 특징과 절차를 거쳐 하나의 가문이 지배를 했던 마을입니다. 하회마을은 풍산유씨 가문이 기존의 가문을 몰아내는 마을이었고, 양동마을은 이씨가문이 기존의 손씨 가문을 몰아내고 마을을 지배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바탕은 기본적으로 풍수지리 사상을 전제로 하고있었는데, 집의 향을 결정하는 것은 지형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풀이 되었습니다. 안동의 하회마을은 연꽃이 물위에 떠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연화부수라고도 불리어 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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