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기 공포(주심포,다포)


이번시간에는 조선초기 공포형식인 다포에 대하여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다포는 고려시대때 부터 사용된 경향을 보이다가 조선초기에 들어와서 숭례문을 기점으로 궁전이나 성문같은 중요시설에 주로 사용된 사례를 볼 수있습니다. 다포의 기능은 지붕을 올려주며, 소규모 부재의 포부재가 중첩되며 나타나는 의장적인 기능까지 갖게 해주는 공포형식입니다.


 

 

 

1. 궁궐건축(숭레문)

위에서 말씀 드렸듯, 숭례문에서 조선초기 다포형식이 보여지는데, 숭례문은 조선건국당시 창건되었다가 세종조때 재건되었습니다. 세종조의 시기라고 함은 장인들의 관리를 공조가 맡고 산하 기관인 선공감은 건축공사를 계획했던 부서였는데 이를 볼 때 장인 기술자들의 강력한 통솔과 더불어 기술적 지도하에 숭례문이 재건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숭례문은 몇년전 방화사건으로 인해서 다시 지어졌지만 화재가 일어나기전까지는 세종때의 문화유산으로 기억되고 있었는데 그저 안타까울 뿐이고, 다시는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어의없게 잃는 경우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숭례문은 다포에 우진각집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주로 궁궐의 문루나 육축위에 조영된 성곽의 문루에서 팔작지붕이아닌 우진각지붕을 사용하는 이유는 지붕면이 크게 강조되는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붕면이 강조된 우진각 지붕의 지붕가구 특성상 추녀의 뒤뿌리가 길게 구성되어야 하여 대구경 장재를 수급해야한다는 수급적 단점이 있어, 상대적으로 목조 가구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조선초기에는 많은 건물에 적용되기 힘든 기법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출목수는 내외 2출목이며, 살미는 초제공과 이제공으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으며 살미의 외단은 쇠서로 처리한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보머리는 삼분두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숭례문과 같이 조선초기의 대표적 건물은 평양의 보통문과 개성의 남대문등이 있습니다.

 

2. 불교사찰

조선초기 불교사찰에서는 다포가 궁궐건축만큼 활발히 진행되지는 않았으나, 서서히 다포의 추세로 가는 경향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심포식이 아직까지 주를 이루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는 무위사 극락전, 관룡사 약사전, 도갑사 해탈문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건물들은 고려시대 주심포 형식을 기본으로 하면서 건물마다 세부적인 것들을 달리하며 조선초기 주심포를 이끌어 나갔다고도 볼 수있습니다.

부재의 세부가공을 살펴보면 고려를 계승한 경사진 첨차의 사용과 헛첨차가 쓰이는 건물이 있는데, 대게 이당시 헛첨차를 두는 건물은 규모가 작은 경향입니다.

 

조선초기 당시 불교에 대한 억압은 중기만큼 심하지 않아서 승려들에 대한 국가의 인정이 어느정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건축공사에서 공을 세우면 승려 자격을 인정하는 도첩제를 실시하였고, 도첩제도를 실시함에 따라 승려들이 건축공사의 일정한 지휘권한을 얻었습니다.

 

3. 객사

조선초기 주심포 건물에 속하는 대표적인 객사로써는 안성객사가 있습니다. 굽받침이 있는주두, 항아리 대량, 쇠서형태의 첨차, 배흘림 기둥등 고려시대 주심포 건물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모두 갖춘 조선초기 주심포 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주심포와 다포의 혼합

조선초기가 되어 다포의 유입이 증가해도 주심포의 사용은 아직 여전한 추이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주심포의 특징과 다포의 특징을 두루 갖춘 사찰이 있는데 바로 서산에 위치한 개심사 대웅전입니다. 공포는 다포지만, 실내를 연등천장으로 구성하고 대공이 장식이 되있다는 특징이 주심포 형식을 취한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지금까지 조선초기의 공포형식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고려시대를 넘어와 조선으로 들어가는 시기에 다포가 유행의 시작점이었고, 이미 사용하던 주심포가 아직은 주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궁궐과 사찰을 위주로 다포가 확산될 기미를 보였고 그 가운데 다포와 주심포를 혼합한 건물도 등장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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